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디르 샤 (문단 편집) === 실패한 내치와 연이은 반란 === 10여년 간 이어진 나디르 샤의 내치는 그의 전쟁 수행 능력과는 현저히 달랐다. 아니 '''완전 [[막장]]이었다.''' 튀르크계이며 철저한 [[수니파]] 신도였던 그는 시아파를 끔찍이도 싫어하여 200여년간 지속된 사파비 지배의 부산물인 이란의 [[시아파]] 민중들에게 12이맘파(자파리파)를 수니파의 [[마드하브|제5학파]](하나피, 말리키, 샤피이, 한발리)에 포함시켜 수니파를 믿을 것을 강요했다. 거기다가 시아파 율법학자들을 탄압했으며 시아파 종교재단의 토지 대부분을 몰수했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의 연이은 승전보와 강력한 군대와 군대 장악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는 제국의 신민들에게 영광과 동시에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무리하면서까지[* 당시 페르시아의 인구는 1,000만명도 되지 않았고, 부유한 국가도 아니었기에 나디르가 시도한 원정들이 무리하면서 한 것이 맞다.] 시도한 원정들이 전부 승리로 이어졌고 그만큼이나 약탈품도 많았지만 승전보와 함께 무거운 세금 고지서도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백성들의 삶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특히 나디르 샤는 장남의 암살 기도 후 공포 정치의 정도가 심해져서 불만을 품은 백성들은 물론 제국 내의 소수 민족들까지 여러 지역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심지어 수도 '마슈하드'에서조차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 이에 나디르 샤는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그러나 마슈하드의 봉기를 시작으로 페르시아 각지에서 그의 탐욕스러움과 압제에 항거하는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페르시아는 완전히 [[혼돈의 카오스]]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는 훗날 이란에서 시아파 근본주의 및 그로 인한 반수니파 감정이 강하게 뿌리내리는 데도 한 몫 했다고 볼 수 있다. 1745년,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에서 일어난 봉기는 특히 격렬하게 이어졌고, 나디르 샤는 7년 전에 함락했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재함락시키고 가혹하게 응징하였다. 한편, 계속된 반란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힘들어졌고, 기회를 잡은 오스만의 반격으로 정복했던 영토를 다시 빼앗기고 말아 결국 나디르 샤는 1746년, 국경을 1639년의 카스리 시린 조약때로 되돌린다는 '케르덴 조약'으로 오스만과의 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반란은 계속해서 일어났으며 1747년에는 나디르의 고향 호라산에서마저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